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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여성

코덕에서 탈코르셋까지 | 화장품 줄이는 과정기 | 화장품 미니멀

2020. 9. 16.

목차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하던 코덕 | 피부 상태 | 화장품 회사 취업? | 점점 줄여가다 | 현재 그리고 앞으로

사실 완벽한 탈코르셋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글을 쓸지 말지 고민하였지만 내 생각 정리용과 혹시나 읽고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쓰기로 했다.

2018년 1월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하던 코덕

고등학교 때는 선크림과 틴트가 전부였던 나는 수능을 앞두고 흔히 말하는 ‘캠퍼스 여신 혹은 공대 아름이’를 꿈꿨다. '수능 끝나고 다이어트하고 화장품 예쁜 거 다 사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유튜브를 보면서 살 목록들을 캡처했다.

처음 산 화장품들

그렇게 대학교를 입학하고 화장품을 무지막지하게 사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 모르니깐 무조건 유명한 아이템으로, 용돈에서는 벅찼지만 그래도 구매를 이어갔다.그렇게 극적으로 달라지는 내 얼굴을 보니 너무 신기했다. 아토피가 심했기 때문에 그걸 가리겠다고 촉촉하면서 커버력이 좋은 베이스 제품을 찾는데 열중했고, 그 위에 진물이 나도 화장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내 기숙사 서랍

대학교 기숙사에서 아침을 먹기 내려가는데도 일찍 일어나서 화장을 했다. 남들의 시선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흔히 말하는 '쌩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내가 부지런하다고 했고, 나는 남들보다 화장 시간이 짧기 때문에 5-10분이면 된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네일에도 관심이 많았다.

뷰티 유튜버도 유행하면서 모조리 다 구독하고, 신상과 예쁜 화장품들을 위시리스트에 항상 추가하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찍었던 사진

'하늘 아래 같은 색은 없다' 이 말은 나의 소비를 몇 배 부추겼다. 그 미묘한 차이들이 설령 나만 알아차리더라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뷰티 계정도 있었다

'글로우픽' 이라는 화장품 어플에 후기를 많이 남겨서 평가단 체험도 꽤 했고 뷰티 블로그 포스팅도 가끔 했다. 그러다 보니 주위 친구들은 항상 나에게 화장품을 추천해달라고 했고, 나도 재밌어하면서 추천해줬다. 그렇게 나는 '코스메틱 덕후, 코덕'으로 불리었다.

피부 상태

심한 아토피 빼고는 학생 때부터 여드름이 나본 적이 없는 극극건성의 피부였다. 하지만 뒤늦은 성인 여드름이 찾아왔고 아토피와 여드름이 공존하는 최악의 피부 상태를 맞이했다. 그럴수록 나는 병원의 도움을 받는 것 대신 화장품을 찾았다. 여드름에 좋은 기초 화장품을 매일 찾고 구매 후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화농성 여드름으로 온 얼굴이 뒤 덮였지만 그럴수록 더 화장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화장을 지운 내 얼굴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집 뒤 등산을 갈 때도 화장을 하고 갔다.

화장품 회사 취업?

화장품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소비자로써 끝나지 않았다. 내 전공은 화학공학과와 밀접했는데, 취업 시기가 다가오자 자연스레 나는 진로를 화장품 회사로 정하였다. 나로선, 그리고 주변인들에게도 아주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교수님과의 면담에서도 '저는 화장품 회사 아니면 안 갈래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관련 자소서를 쓰는데 단순히 화장품이 좋다는 이유로 자소서를 채우기에는 턱 없이 관련 지식과 동기가 부족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작성한 자소서를 제출하고 광탈하고를 반복했다. 중견 화장품 기업의 면접을 본 적이 있다. 첫 면접이라 복장이 스트레스였다. 그 때쯤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고, 옷 입는 스타일이 바뀌었기 때문에 치마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슬랙스와 로퍼, 재킷과 패딩을 입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여성분들을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처럼 또각 구두에 치마, 깔끔히 틀어 올린 머리를 똑같이 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불편해 보였고 나는 그들에 비해 편해 보이진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첫 면접에서 헛소리를 작렬하고 떨어졌다.

점점 줄여가다

취업도 어렵고 흥미는 점점 떨어졌다. 진정 내가 화장품을 좋아한게 맞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스타일은 계속 바꿨는데, 흔히들 말하는 '보이쉬'한 스타일이라고 해두자... 아무튼 그렇게 입는 와중에도 진한 화장은 포기가 안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졸업 후 극심한 아토피를 치료하고, 미니멀리즘과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서서히 바뀌었다.

일단 아토피가 정말 심했던 중에도 얼굴에서 찐득한 진물이 날 때도 그 위에 아이섀도우를 칠했던 나였다.

특히 심했던 눈 주위

대학 병원에서 아토피를 천만 원 단위의 돈을 들여 치료하기 시작했고, 기적과 같이 호전되었다. 그렇게 얼굴이 괜찮아지니 여전처럼 두꺼운 화장이 필요 없었다. 또 아토피에 악영향을 끼칠까 봐 줄였던 것도 있다. 

맨 처음은 파운데이션을 바르지 않았다. 얼굴이 답답하고 클렌징도 귀찮았기 때문에 컨실러를 사용해 흉터들을 가렸다. 그리고 그 위에 색조 화장을 했다. 그 다음은 마스카라. 마스카라의 효과는 커서 항상 언제나 바르고 다녔지만, 어느 순간 너무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로 리무버과 솜을 사용해서 꾹 누르고 있다가 지워내야 하는 과정을 한 번 더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은 단순히 귀찮아서였는데, 한 번 안 하다 보니 별 차이도 없었다. 그리고 속눈썹이 미친 듯이 빠지고 눈 시림 증상도 사라졌다.

줄인 화장품

미니멀리즘도 비슷한 시기에 접했는데, 안 쓰는 화장품이 쌓여있는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쓰는 화장품은 몇 개 안되는데 병적으로 모아둔 것이었다. 미니멀리즘 덕에 화장품을 80% 정도까지 처분할 수 있었다. 비싼 백화점 화장품들은 중고나라에 팔고, 다른 건 과감히 버렸다. 정리하면서 유통기한이 불분명한 제품이 너무 많아서 놀랐다. 이걸 내 얼굴에 그냥 바르려 했다니... 이때 언니와 조금의 충돌이 있었다. 언니의 입장은 놔두면 다 쓸건대 왜 버리냐는 것이었다. 일단은 내 것이라도 열심히 처분하기로 하고 언니는 천천히 설득하는 것으로 바꿨다.

파운데이션, 마스카라를 바르지 않은 다음엔 화장품 개수는 3개 미만으로 유지했고 더 이상 구매도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좋아했던 나스

하지만 색조 화장은 포기하기가 많이 어려웠다. 특히 아이라이너를 그리지 않은 내 눈은 너무 작고 답답하다고 느껴졌고 립도 나를 흔들어 놓는 예쁜 색상들이 세상에 너무 많았다. 한달 동안의 해외 생활에서도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아이라인은 위로, 색상은 더 짙고 어둡게 칠했다. 그렇게 하면 더 세게 보일 줄 알았다. 내 내면은 한껏 움츠러들어있는데, 떨어진 자존감을 화장으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식한 백인남에게 몇 차례 캣 콜링 비슷한 경험을 겪기도 했다. 그들 눈엔 내가 여전히 만만하고 약한 동양 여자로 보였나 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 덧붙이자면, 화장을 줄일 수록 피부는 좋아졌다. 여드름도 서서히 다 사라졌다.

현재 그리고 앞으로

코로나가 심해지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화장과도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또,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다. 마스크 때문이라고 해도 한 친구가 처음으로 화장을 하지 않고 나왔다.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는 '왜 난 아직도 조금이라도 화장을 하고 나가는 거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또 아직 중학생인 동생이 나에게 '언니는 왜 화장해?'라고 물었다. '자기만족'이라는 변명을 할까 하다가 현타가 와서 지금은 화장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남은 화장품. 립 제품은 더 있다.

지금은 남아있는 화장품이 색조 1개, 브러쉬 1개, 립은 5개 이상이다. 정말 그동안 많이 처분했다. 하지만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건 립 제품이다. 그래서 완벽한 탈코르셋이라 말하지 못하는 것인데, 이 '완벽'이라는 것도 아리송하긴 하다. 어쨌든 립은 내가 코덕 시절에도 가장 좋아했던 제품인데, 특히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브라운, 회색 빛이 도는 MLBB에 미쳐있었다. 그냥 색을 모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이유였다. 특이한 색이 좋았다. 이걸 다 무시하고 화장품을 정리하다 보니 가끔 립에 대한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럴수록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무조건 나를 제한하면서 죄책감을 갖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정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구매한다. 어차피 마스크를 쓰고 밖에 나가지도 않는데 왜 구매하고 싶은지 생각해봤는데, 정말 내가 아직은 립 하나는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안 쓸 것 같은 베이지 누드 색이나 된장 색 등등. 사실 핑계처럼 들리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어쩌다 가끔 모으는 재미를 적당히 즐기려 한다. 너무 과하지만 않다면, 기분 전환용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또, 어느 날 질리고 바르기 싫다면 언제든 처분하면 된다. 빈도도 점점 줄 것이다.

버릴 박스

앞으로는 화장품 자체의 구매는 거의 없을 것 같다. 립 제품도 아주 가끔만, 특이한 색상을 찾을 때 구매할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천천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도 2년에 걸쳐서 서서히 줄여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화장을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도 없다. 처음은 내가 불편해서 안 했던 것이고 그 뒤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었다. 탈코르셋이라는 사회적 운동은 지지하지만, 모든 여성에게 똑같은 기준과 잣대를 댈 순 없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하면 된다. 각자의 속도도 다르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화장을 안 한 내 모습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인 것 같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간, 돈 심지어 피부까지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화장을 하지 않은 나에게서 느끼는 혐오감과 괴리감이 점점 사라졌다는 것이다. 내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화장을 계속 했다면 깨닫지 못한 채로 계속 살아갔을 것이다. 그걸 꼭 다른 여성분들도 느껴봤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나는 이제 중학생의 내 동생 앞에서도 당당하고, 거울 앞에서 나에게도 당당하다. 하지만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천천히 나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화장을 하던 말든 관심 없는 세상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수 있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자유를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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